1999년 9월 7일, 드디어 공익근무요원이란 명패를 붙인 지
1년이 되었다. 우선 드는 생각은 세월 참 빠르단 것. 꽤나
새삼스런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새 이렇게 훌쩍 시간이 흘러버렸나, 그간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나 하며 달력이건 다이어리건 이것저것 들쳐본
다. 모두들 며칠 전 있었던 일 같게만 느껴진다. 새록새록
작은 기억들이 박혀온다.
작년 이맘때쯤 난 조치원에 있었다. 단절은 4주라는 한정
된 시간이었지만 어이없게도 아쉬운 감이 느껴졌었다. 물론
1997년 12월 23일, 첫 번째 입대처럼 삶이 절망스러운 건 아
니었다. 다만 노래방에서 오직 밤새워 뒤척이며 잠 못 들던
훈련소 입소 전날 술잔 나누면서 이제는 남자다 어른이다 다
시 시작이다 그땐 그랬지,를 위해 지루한 2절까지 부르고 있
을 때 짙은 아쉬움이 느껴졌던 것뿐이었다. 그날 밤 조치원
의 풍경은 지금 같아선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곤 다소 우습지만 나, 군대 가, 하며 굳은 폼의 헌병
옆으로 입소.
다이어리를 잃어버렸긴 했지만 다행히도 훈련소 기록은 게
시판에 남겨두어서 가끔 다시 보곤 하는데, 그 시절엔 그렇
게 나가고 싶었었던 훈련소가 지금 와선 참 즐거웠던 기억으
로 남아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다 큰애들이 화장실에서 몰
래 돌려가며 피던 담배의 맛은 가끔 화장실에서 담배를 필
때면 문득문득 떠올려지곤 한다. 그리고 난 피식 웃는다.
또 훈련소에서 난 소대서무계,라는 자그마한 직책을 하나
맡았었는데 그 특혜는 굉장한 편이었다. 이를테면 꽁초 하나
구하기 힘든 세상에서 담배 한 보루 정도는 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덕분에 난 밤을 새어가며 이런저런 계산이나 워드작
업을 했었는데 그리곤 다음 날 아이들 땀흘릴 때 누워 자는
기분도 만만찮게 괜찮았다. 열외,라는 게 그렇게 상큼한 일
인지 몰랐다.
공익근무요원이 되고 나서는 신병 시절의 몇 가지 생각나
는 것밖에 없는데, 역대 최강인 우리 기수는 그토록 무자비
하게 얼차려를 받았음에도 그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나지 않
는다. 다만 아무 것도 모르던 신병 시절 몰래 여자친구에게
전화하던 그 사소한 즐거움과 조금 짬 먹고 나서는 일 있다
고 외출하여 종로까지 가서 몰래 점심 먹고 허겁지겁 돌아오
던 기억 같은 게 더 생생하다. 물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전
혀 없게 됐지만. 그래서 더 생생하게 나는 것도 같다.
사실 처음엔 공익근무요원,이라는 게 그리 떳떳하지는 못
했다. 차라리 염색일지라도 산업체 특례를 갈 걸 하는 후회
도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선 잘한 결정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틀림없이 구속받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고, 또 웬만한 건 하고픈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는 이야
기. 다른 건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는데 정말 두렵다, 이 억
압이 끝나고 자유로움과 함께 찾아올 25이란 나이가. 그땐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일렬로 짜 맞춘 바퀴
벌레처럼 나 역시 도서관에서 고개 숙인 시체가 되는 건 아
닐까,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가득 찬 머리로 개혁과 변화
를 꿈꾸는 이들을 비난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땐 그랬지 하
며 오직 향수 속에서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25이란 나
이는 정말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른다는 걸 난 알고 있다. 아
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지금, 1년이 흘렀다.
조용히 홀로 촛불을 켜고 자축해 본다.
아무 사고 없던 내 1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