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상주에서의 23시 30분.
2000년 1월 1일을 100일 앞뒀다던 그날이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차안에서 자다 깨다 반복하
며 보낸 100일 전 2000년 1월 1일.
고민 끝에 결정한다.
기다리자. 운명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자. 조급해하지 말
자.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자.
2. 상주에서...
상주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PC방에서 산 것밖에 없다. 23
일 밤늦게 도착하여 24일 아침 일찍 차례 지낸 후에 하루종
일 PC방에서 뒹굴거리다가 24시 무렵 돌아와 보니 모두들 잠
들어있었다.
상주의 밤거리는 여전히 황홀했다.
상주에서는 유행이 그런 것이었던지 젊은 남자라면 모름지
기 짧은 스포츠 머리에 복고풍 정장에 핸드백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황홀경에 홀로 있다는 사실은 고통이
었다. 친구 하나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건만...
돈도 조금 있고 해서 홀로 바에 들어가 술이나 마시며 기
회를 엿볼까 고심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어찌하다보니 PC방에
서 모든 시간을 축내고 말았다.
이번엔 상주에 있던 시간이 워낙 짧았기에 특별히 한 게
없지만 언제였던가 홀로 상주의 근처 미술관을 배회했던 기
억이 났다. 어쩐지 PC방보다는 미술관이 보다 폼 나지 않나
한다. 어떻게든 다음엔 상주에 계집을 하나 심어두어 함께
미술관이나 가봐야겠다. 끙. --+
3. 담배
상주 가는 시간동안은 내게 있어서 금단의 시간이다. 아버
지야 마음껏 담배 피시건만 아, 엄격한 예의 속에서 난 어른
과 맞담배질 만큼은 하지 말도록 배워왔다.
운이 좋으면 휴게소에 들리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몇
시간동안 고통은 계속된다.
드디어 상주, 도착하여 몇 시간만에 담배를 한 모금 빤다.
처음 담배 피는 어린아이같이 아찔해진다. 일전에 금연기간
을 정했던 게 2년 전 일일까, 3년 전 일일까...
그리고 아침, 일어나자 피는 담배만큼 해로운 것도 없을
듯 하다. 그렇게 담배를 필 때면 심장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그런데 그 고통이 이상스런 쾌감을 준다. 내 몸이 조금씩 조
금씩 죽어간다는 게 이상스런 쾌감을 주는 게다. 오묘하다.
기록해야할 또 하나의 사실.
이번 추석 때는 이상하게 담배를 많이 잃어버렸다. 어디
다른 곳에 두는 것도 아니고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인데
도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이틀 남짓 시간동
안 무려 4갑의 담배를 산 듯 하다. 역시 오묘하다.
4. 온천
우리 집안의, 특히 내 어머니의 특기, 온천에서 목욕하기.
--; 이건 하도 어려서부터 당해왔던 터라 이젠 이골이 났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
역시 온천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신다.
몇 해 전 내가 장풍을 쏘아 온천탕을 무너트린 적이 있다.
물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나하나 각개격파해 나가는 수밖에 없나
보다. 이 세상의 온천탕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내 氣를 날
려야겠다. 끙.
5. 옥상
내 시골집은 상주 시내에 위치한 1층 양옥이다. 아주 어려
서부터 그 모습이었는데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훨씬 지났
건만 여전하다.
그곳 옥상은 예전부터 내 차지였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홀로 옥상에 올라 그늘에 누워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이
런저런 생각도 했던 곳이다.
이번엔 날씨가 흐려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잠시 올라갔던 게 고작이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추억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1년 전, 훈련소에서 막 나와 그곳에서 옛 음악가들의 이야
기며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며,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학생일 때도, 공익근무요원일 때도, 그러고 보면 항상 난
옥상에 혼자 있었던 것 같다. 홀로 되기를 꿈꾼다면 옥상에
올라가 보기를...
6. 어른
2년 전 이 무렵 읽었던 박일문의 장미와 자는 법,을 다시
한 번 읽게 됐다. 역시 내 인생 단 한 권의 책이었다. 그렇
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다.
온천탕에서 혼자 먼저 나와 호텔 앞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런데 남녀 한 쌍이 아주 다정
하게 내 옆을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들었던 게다.
보.다.어.른.스.럽.게.살.아.야.겠.구.나.
싸구려 여인숙 대신 멋진 호텔에 가는 게 어른스러운 건
아니다.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아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요즘 Speed 011, CF에 나오는 그런 여자와 사귀는 건 어른
스러운 일이다. 내 차에 애인을 태우고 여행을 떠나는 건 어
른스러운 일이다. 아저씨 같게만 보였던 정장바지가 잘 어울
리는 것도 어른스러운 일이다.
지금 내가 말하는 어른스러움은 외적인 것에 한정된다.
어른스럽게 되는 가장 쉽고도 편한 방법은 괜히 비난해 대
는 거다. 유치해, 애들처럼 그게 뭐야,하며 이유 없는 투정
으로 비난하다 보면 난 어른스럽게 되어있을 게다.
어려만 보였던 사촌 동생이 이제 중1이라고 힙합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 내가 입었던 그런 모양의 힙합
바지.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난 힙합 바지를 입지 않고 있었
다. 그렇게 귀여워만 보였던 힙합 바지인데... 내 방 어딘가
에 처박혀 있을 힙합 바지를 생각했다.
그 시절엔 나이에 상관없는 젊음을 꿈꿨었다. 서른, 마흔
이 되어도 힙합 바지를 입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최신 유행
랩을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사람은 나이
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어른스럽게 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Speed 011, CF에 나오는 그런 애인과 사
궈야겠다. 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