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행 711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은 건 지난 7일, 오후
7시 45분이었다. 급하게 떠나느라 예매를 하지 못해 입석이
었지만 1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은 거리였기에 부담이 되지
는 않았다. 서대문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여 스포
츠신문 하나 달랑 들고 열차에 올랐다.
좌석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일행이나 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열차에 타자마다 창이 달려있는 구석에 철
썩 주저 않았다. 신문을 찬찬히 넘기고 있을 즈음 열차는 서
서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저녁 7시 45분.
참으로 오랜만에 떠나는 밤기차 여행이었다. 기차 여행이
라는 이름에서 느낄 법한 낭만은 나라고 없겠느냐만 천성적
으로 나라는 인간은 멋스러운 낭만과 거리가 있던지 밤기차
여행할 시간이 있다면 대개 폭음에 시름하고 있던 게 사실
아니던가.
오랜만에 떠나는 밤기차 여행인 만큼 입석인 데에 아쉬움
도 컸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옆자리에 아주 괜
찮은 여인이 앉아 노르웨이의 숲에 가보셨냐고 물어보는 상
상이 얼마나 유치한 발상인가는 모르는 바 아니나 그런 상상
한 번 해보지 않는 것 또한 잔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주 우
연히 내 옆자리에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는 괜찮은 여
인이 앉아 우연적이면서도 순간적인 만남을 한 번쯤 갖고픈
상상은 나 역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자리는 화장실 옆 계단. 그나마 내 앞에 바로
창이 하나 있던 거에 만족해야했다. 신문을 다 본 후에 나는
홀로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1996년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했던 곳과 같은 곳을 고
등학교 친구들과 떠난 적이 있었더랬다. 그 때 우리 넷은 함
께 있을 때 두려울 것이 없었던 젊은 20살이었고, 숨가쁜 고
등학교를 떠나 세상 모든 것이 내 것 같았던 대학 새내기로
서 창 밖의 어두운 공기에 열광했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
났다. 꽤나 추웠던 1996년의 3월.
도심을 벗어나 접하게 되는 건 농촌이다. 비록 농촌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코스모폴리턴을 지향하든 말든 어쨌든
나는 한국인인지라 농촌을 보면 마치 내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어머니의
손맛을 생각해 보고, 마을 어르신의 에헴, 하는 소리도 어디
선가 들어오는 것 같다. 정이 있고, 순박함이 있는 농촌의
풍경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저녁 9시가 넘어 도착하여 친구를 만나 한 일이라곤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또 미친 듯이 굉음으로 노래를 불러댄
것밖에 없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참 부러웠다. 평온함이 느껴지는 한적한 곳에서 아름다운
방을 꾸며 혼자 살아가는 것이. 차분한 분위기도 참 마음에
들었고, 세상의 연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어 보이는 모습도
나를 유혹했다. 돈을 모아 조그마한 원룸 하나 마련해야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1박 2일의 짧은 밤기차 여행을 마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다음 주 화요일까지 끝내야 한다는 독촉전화와 작업파일을
가득 담은 메일들이었지만 이것이 내 생활이고 삶이라는 데
에 불만은 없다.
저녁, 한 친구는 전화를 하여 일반적으로 살아가라고, 너
무 많은 걸 한 번에 하려 한다고 내게 이야기해줬다. 안 그
래도 이번 여행에서 생각했던 바다. 나는 한창 공부하고, 사
랑하여야할 시기에 왜 굳이 그러하지 않아도 될 사회에 끼어
들려하고 있을까.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바로 그거다. 평탄하게 찬찬히 살
아가자, 그러나 이왕 시작한 거라면 최선을 다하고, 후에 후
회하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하자. 바로 그거다.
이미 많은 부분 변절한 친구는 나를 위해 말해줬다. 25살,
이제는 미래를 생각할 시기라고. 나를 가장 많이 생각해 주
는 다른 친구는 말해줬다. 적당히 삶을 즐기며 살아가라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하려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