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오랜만에 시험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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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77 Vote: 29 )

지난 2-3주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용민은 전화를
걸어 오늘 시험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렇지만 용민의
감격스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험공부를 할 만한 상황
이 아니었다. 지난밤에도 밤을 꼴딱 새며 경찰청에서 맡은
바 업무를 하여야 했기에.

그렇게 밤을 새고 오후 2시 경 출발하여 시험 20분 전에
강의실에 도착하였다. 지금의 시대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96, 1997년이 아니라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이
제 곧 보게 될 시험에 다소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시험 공부를 전혀 하지 못
한 데서 느낄 법한 걱정이 있을 만도 한데, 사실은 1997년
이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시험에 들뜬 기분이었다. 나는 학
창시절의 아이처럼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들에게 잘 부탁한
다며 농을 건네곤 했다.

그나마 나와 놀아주는 친구는 역시 용민 뿐이다. 다른 친
구들은 그다지 친하지도 않지만, 마지막으로 시험범위를 정
리하는 데에 바빴다. 용민과 복도에 나와 커피 한 잔 마시니
시험이 시작됐다.

"여기서부터는 709호 강의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들어온, 공부나 했을 법하게 생겨먹은 조교는 짧게 첫 마
디를 던졌고, 나와 용민, 브레드, 형종 등의 무리는 해당 범
위에 앉아있지도 않았으면서 공부 열심히 하는 유일한 친구,
정영이를 따라 709호로 이동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 시작.
3년 전이나 시험지 돌리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나 보다. 앞
에서부터 돌려 건네져 오는 16절지 시험지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내 앞에는 정영이, 옆에는 브레드, 뒤에는 용팔이, 대각선
에는 형종이. 나는 나름대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
벽하게 나를 둘러쌓아 조교의 어떠한 시선에도 완벽한 컨닝
을 할 수 있게끔 나름대로의 장치를 해놓은 셈이었다.

아!
그.러.나.
막상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3년만에 받아본 시험지에는 무
슨 얘기인지도 모를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틀림없이 우
리나라 말로 쓰여져 있긴 했는데 나는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의욕을 잃은 건 그 때부터다. 나는 컨닝할 생각도, 괜히
지루하게 시험지를 쳐다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접
하는 시험이 줬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던 게다.

시험, 내 미래를 결정짓게 되는 것들 중 한 가지인 시험이
라는 현실과 직접 맞대하고 나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유아
적인 발상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는지 금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문제 한 번 쭉 읽어보고, 이건 내가 풀 문제가 아니
라는 걸 확인한 후 바로 일어났다. 시험이 시작된 지 1분도
되지 않아 나는 터벅터벅 조교에게 다가가 백지 시험지를 제
출했다.

걸어나가는 나를 보던 조교에게서 나는 영화 넘버3의 송광
호를 생각했다.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는 거야. 그럼 그 양키 놈이 이 자
식 왜 이래, 왜 이래 이럴 거란 말야."
조교가 나를 보며, 이 자식 왜 이래,란 생각을 하지는 않
을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시험지를 제출하였다.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한 건 전혀 아니다. 내 자신에게 실
망한 것도 물론 아니다.

나는 단지 학교를 걸어 내려와 경찰청으로 다시 향하며 초
여름, 창 밖의 풍경이 너무 평화롭다고 생각하였다. 따사롭
게 내리쬐는 햇살에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덕수궁 앞에서 내려 잠시 돈화문 앞을
서성거렸다. 그 평화로운 사람들 곁에서 잠시 여유를 느끼고
싶었던 게다.

무엇이든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
다. 너무 많은 욕심으로 모두 다 놓쳐버리기 보다는, 하나를
하더라도 반듯하게, 꼼꼼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종로3가로 걸어 나아갔다.
용민은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거냐고, 괜찮냐고 물어왔지
만 나는 정말 괜찮다. 원체 나는 시험 따위에 걱정하는 학생
도 아니었고 또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내년에 학교를 다니
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별 감흥이 없다.

그냥 기분이 좋다. 따사로운 날씨가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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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